조선시대에는 서천군(舒川郡)과 한산군(韓山郡)의 중간에 위치해서 한산읍내의 서쪽 위편이 되므로 한산군 서산면(西山面)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옛날부터 선현(先賢)이 태어난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문재(文才) 유현(儒賢)이 많은 반면에 한산모시 모시풀의 발생지로도 널리 알려졌다. 모양이 기린같다 해서 기린봉(麒麟峯) 기린산으로 통하는 산높이 760m의 산명에 연유하여 기산면(麒山面) 이라 하고 1914년에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기산면에 거주하는 대성(大姓)은 이씨(李氏) 노씨(盧氏) 나씨(羅氏)로 기산면의 전체인구의 90%를 차지한다. 한산이씨(韓山李氏)가 250여호 교하노씨(交河盧氏) 210여호 금성나씨(錦城羅氏) 100여호이면 기산면의 인구분포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외로 여산송씨(勵山宋氏)가 30여호로 대성가운데 든다.
한산군 서상면(西上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가좌(加左)와 온공(溫公)의 이름을 따서 가공리라 하였다.
가남재 고개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가남재라고 부른다.
가좌(加左) 가좌리(加左里)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낮은 산에 둘러쌓여 있으므로 가재울 이라고 부른다.
삼밭이 많은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삼바울이라고 부른다.
마을옆 모퉁이에서 옛날에 청룡이 승천하였으므로 이에 연유하여 청룡이라고 부른다.
웃가재울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뜨거운 물이 땅에서 나오고 선비가 택한 마을이라 온공.온골실,또는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온군절이라고도 부른다.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광현(光峴) 쌍암(雙岩)의 이름을 따서 광암리라 하였다.
광현(光峴)이라고도 부른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묘소가 자리한 곳으로 옛날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곳에 와서 지형을 살펴본 즉 빛이 쪼이는 곳이라 광현이라 부르게 하였는데 그 후 빛고개라고도 부르게 된 마을이다.
등곡(燈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뒷산에 괘등형(燈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등곡이 변하여 등굴이라고 부른다.
쌍암(雙岩) 쌍암리(雙岩里)라고도 부른다. 마을 뒷산에 쌍으로 된 바위가 있으므로 쌍바우, 쌍암, 쌍암리라고 부른다.
한산군 서하면(西下面)의 지역으로서 두문동(杜門洞)안쪽이 되므로 안두문 또는 내두문이 또는 내두문동(內杜門洞)이며 내동이라고 부르던 지역으로 1914년 내동리(內東里)라 하였다. 교하노씨(交河盧氏)가 많이 거주하며 그 집성마을도 있다.
들건너에 새로 된 마을로서 안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신내동이라고 부른다.
여우동(如牛洞) 여우매라고도 부른다. 여우가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라 그리 부른다.
옛날에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절골 절굴이라고 부른다.
두남리는 두문이의 남쪽이 됨으로 두남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내남리, 외남리, 내동리를 합해 두남리라 하였다. 두남리에는 오매, 소로지, 밭두문이, 고란등이 있다.
고란열이라고도 부른다. 여울 안쪽에 있는 마을로 백제부흥운동에 실패한 백제 유민들이 처음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 넋으로 난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 한다.
외남(外南) 외남리(外南里) 외동남리라고도 부른다. 밭두문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소나무가 많으므로 소로지라고 부른다.
오매는 큰길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거북이 등 모양을 닮았기 때문에 자라오(鰲)자를 붙여 오매이다. 즉, 자라등 모양의 산으로 오뫼, 오매라 부른다. 또한, 화양들, 두문이들과 가까워 까마귀가 많이 날아와 오(烏)산 이라고도 한다.
한산군 서하면(西下面)의 지역으로서 두문동 북쪽이 되므로 두북아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때 두북리(斗北里)라 하였다. 교하노씨(交河盧氏)가 많이 살며 그 집성마을도 있다.
계촌(鷄村) 닭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머리쪽과 같다는 지형에 연유해서 닭마을 계촌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댕머리라고 부른다.
두문동(杜門洞) 두여동 두문리라고도 부른다. 백제유민들이 처음 마을에 살기시작 하였다는 고장이다. 사람들이 세상 나가기를 싫어하고 스스로 제약속에 문을 달아맸던 마을이라 두문동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두문이 두여동이라고 부른다.
연정동(連亭洞)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연정(連亭)이란 정자가 있었던 마을이다.
고려말기에 왜구가 쳐들어와서 우리군사와 일전을 벌렸던 자리이며 전에 장이 섰던 마을이다.
한산군 서하면(西下面)의 지역으로서 옛날 뒷산 장군봉에 군사들이 진을 쳤을 때 군사들이 이곳에 막을 치고 파수를 보았다 하여 막골 또는 막동(幕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막동리가 되었다. 금성나씨(錦城羅氏)가 많이 살며 그 집성촌도 있다.
마을에 당제를 지내는 신당이 있는 당산이 있으므로 당살매라고 부른다.
옛날에 두루미가 많이 날아와서 서식하던 자리에 마을이 생기고 항시 길한 일만 생긴 마을이라 백조개라고 부른다 한다.
마을 북쪽에 마을이 생기므로 북쪽에 마을이 생겼다 해서 북척매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막동리의 원마을이다.
한산군 서하면(西下面)의 지역으로 마을 중간에 산이 있으므로 산넘말이라 하다가 변하여 산말녀밑 또는 정자나무가 있으므로 산정말 산정여라 불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산정리(山亭里)라 하였다. 한산이씨(韓山李氏)가 많이 거주하며 그 집성마을도 있다.
산말너멀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말너멀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한산군 서하면(西下面)의 지역으로서 원래 신산(辛山)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신산리(辛山里)라 하였다. 한산이씨(韓山李氏)가 많이 거주하며 그 집성마을도 있다.
신산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다.
방죽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땅에서 더운 물이 나오는 마을임으로 온수굴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서하면(西下面)의 지역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영모암이 있으므로 영모암 또는 영모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영모리가 되었다. 한산이씨(韓山李氏)들이 많이 살며 그 집성마을도 있다.
남배라고도 부른다. 넓은 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큰 밤나무가 마을에 있어서 밤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밤굴이라고 부른다.
건지산성(乾至山城)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산성너머라고 부른다.
숭정산(崇禎山)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한산군 서하면(西下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원동(院洞)과 길산(吉山)의 이름을 따서 원길리라 하였다.
진산(鎭山)을 보고 질매를 보며 선비들이 글을 읽기에 좋은 지역이라 하여 문경촌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에 들새가 많이 나는 마을이고 지형이 뱀처럼 생겼다 해서 비야목 이라고 부른다.
원동(院洞)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에 길산원(吉山院)의 자리다.
마을에 찬 샘이 있으므로 참샛골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서상면(西上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월천(月川)과 삼기(三岐)의 이름을 따서 월기리라 하였다.
삼기리(三岐里) 세거리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세 갈래의 길이 있는 마을이라 세거리 삼기 삼기리라고 부른다.
마을앞과 뒤에 펼쳐지는 시야가 모두 금빛찬란할 때 마을에 길한 일이 생긴다 해서 금밭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길한 일이 많이 겹치는 마을이었다.
월천(月川) 월천리(月川里)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달처럼 생겼으며 마을을 싸고 흐르는 냇물에 복이 깃들어 있다 해서 달구내 월천 월천리라고 부른다.
월천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목화밭이 많았던 마을이라 면우지라고 부른다.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샘너머에 마을이 있으므로 샘너머라고 부른다.
한산군 서하면(西下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이곳에 있는 화양산(華陽山)의 이름을 따서 화산리라 하였다. 여산송씨(勵山宋氏)가 많이 살고 그 집성마을도 있다.
문학동(文學洞) 문학골 수출(水出) 수출리(水出里)라고도 부른다. 산골짜기에서 물이 사철 나와서 물이 흔한 마을이다.
전에 서당이 있었던 마을이다.
역촌(驛村) 신곡 새태골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에 신곡역(新谷驛)이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에 주먹이 있었으므로 주막개라고 부른다.
옛날에 절이 있었던 마을이다.
지형적으로 위치가 한 구석을 차지하고 마을이 있으므로 구석골이라고 부른다.
한산군 서하면(西下面)의 지역으로서 고려(高麗)때 누른 절이 있었으므로 누른절 또는 황사(黃寺)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황사리라하였다.
관동(冠洞)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에 갓점이 있었던 마을이다.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전에 기와를 만들었던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