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축제 왜 ???
존경하는 노박래 군수님.
설 명절 가족과 함께 잘 지내셨으리라 믿습니다.
1929년에 전남에서 살던 박정순 씨라는 사람이 이곳 서천군 서면 도둔리 남촌 해안가에 자리를 잡고 김(해태)을 서해안에서는 최초로 시작하였습니다. 작은 대나무를 앞바다 뻘 땅에 꽂아 김의종자가 있는지 몇 년을 연구 확인하여 종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바다에 소나무 말목을 박고 왕 대나무를 조그만 하게 쪼개 새끼줄로 엮어서 건홍을 시작 하였습니다.
소위 지주식이라는 김 양식 방법입니다. 우리 김 양식 어업인 들은 수 십여년을 지게를 등에 지고 다니며 손과 가위로 김을 채취하여 손으로 제조해 생계를 이어 왔습니다.
그 후 박정순씨를 서면의 소득사업인 김의 선구자로 그 공을 인정하여 공덕비까지 세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대지까지 희사 한다며 김(해태) 박물관을 건립 하자고 했지요)
그 후 1980년경에 나라가 발달하면서 김양식 방법도 발전하게 됩니다. 노동집약적인 지주식은 서서히 자리를 잃고 노동력을 최소화하면서 수확량을 높일 수 있는 양식 방법으로 대체 되었습니다. 즉 부류식 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이 방식은 작업하기가 편리하고 수확량이 증가하면서 비인일부 마서면 일대로 확산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서천군에는 맛김 공장이 없어, 김이 나오는 대로 보령사람들이 서면 김을 전부 매입해가서 가공하여 대천김이라는 상표를 붙여 상품화하게 되었고, 그 결과 대천김 하면 전국 어디에서도 알아주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서면에서 나오는 김을 가지고 대천 사람들이 명품 화를 한 것이 아닌지요?
지금은 서천군에서 충남의 95% 생산 그중 서면에서 50% 가 생산 되는 것으로 암이다.
2007년12월6일 태안 앞바다가 기름유출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고, 서면이 역시 피해를 상당이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김양식이 가장 많이 받고, 활선어 위판을 가장 많이 받은 서면 지역이 아니었습니까? 직접 피해본 김 양식어민, 고기 잡는 어업인.
손님이 오지 않아 요식업, 숙박업 등 어느 하나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간접 피해로 많은 고통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실정을 잘 알고 게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것을 볼진대 어찌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자고 하는 김 축제에 서면은 소외되었는지 개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서면 지역 정치인이 없어서 인지, 서면이 협소해서 인지, 서면 어업인 들의 협조가 없어서 인지, 서천군 공무원의 탁상 행정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볼 때 역사를 찾고 후손과 국민에게 알리고 보여주고자 하는
“서천 김 축제”에 서면이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015.2.20.
춘장대; 최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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